The Bridge
우리는 출근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고, 컴퓨터로 일을 한다. 그리고 자기 전까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가상의)친구들과 소통(하길 원)한다.
이런 것들은 언제부터인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이것은 20여년 전에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10여년 전부터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가능해 졌는데, 결국 수많은 정보가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고, 그곳에 존재하고, 또 재생산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의 기존의 작품인 ‘Made in Korea’ 시리즈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포토샵을 이용해 드로잉을 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방식인 유화로 그리는 제작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의 디지털 이미지를 나의 개인 웹사이트에 저장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디지털 이미지란 정보의 웹 주소, 조금 더 정확하게는 URL(Uniform Resource Locator)은 생성된다.
URL은 온라인 상에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공간으로 연결 시켜주는, 또는 말 그대로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정보의 위치, 주소이다. 그런데 나는 언어의 특성을 생각해봤을 때, 그리고 URL의 형태-알파벳, 숫자, 기호로 이뤄진-를 봤을 때, 그것이 단순히 다리 역할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조셉 코수스의 작품을 시작으로, 텍스트로 이뤄진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고, 여전히 존재한다.
유화(원본성이 있는)의 제목과 사이즈, 재료 등등의 정보를 전부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URL은 그 정보들(디지털 이미지와 작품 제목, 사이즈, 재료 등등 전부)로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지칭하는 주소, 또는 ‘이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유화라는 정보가 있는 URL도 그것 대로 독립적인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나는 단순히 알파벳, 기호, 숫자의 형태로만 이뤄진 너무나도 익숙하지만(하루에도 수백만개가 생성되고 사라진다) 동시에 그 형태의 익숙하지않은 조합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언어’인 URL을 작품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것은 굉장히 포스트모던하고 동시대적이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정보들은 복제 그리고 재생산이 너무나도 쉽다.
이번 작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같은 유화 작품의 디지털 이미지를 어떤 인터넷 공간(웹서비스 회사)에 저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정보는 동일하지만 그 형태(URL의 텍스트 형태)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분명 완벽하게 동일한 정보(이미지)이지만 언어(텍스트)의 형태가 달라지면 그것을 과연 복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동시에 그렇다면 다른 형태의 URL은 원본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란 질문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작품의 표현 방식만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도 결국에는 내가 기존에 해오던 ‘Made in Korea’ 시리즈에서 하고자하는 이야기-이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이 존재할까? 과연 원본성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떠오르지 않은 질문들은 이번 전시와 그 후의 리서치(After the “Bridge”)를 통해서 더 많이 생성될 것이다. 그리고 답을 하면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후에는 진행형이 아닌 완성형이 돼있지 않을까?
Hommage to Kosuth
지금까지 작업해왔던 ‘Made in Korea’ 시리즈는 미국, 중국, 일본에 영향을 받은 한국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그 작품들은 역사적·지정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며, ‘차용’이란 방식을 통해 역설적인 표현으로 한국을 이야기한다.
이번 개인전 ≪Hommage to Kosuth≫는 ‘Made in Korea’ 시리즈를 원본이라 부를 수 있는 유화 작품들과 그 제작 과정(포토샵을 이용해 jpg 이미지를 만든 후, 그것을 전통적인 방식인 유화로 그렸다)을 함께 선보이는데, 전시 구성 방식에 있어서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1965년 작품 <하나이면서 세 개의 의자(One and Three Chairs)>를 차용했다.
알려진 대로 코수스는 ‘의자’라는 실제 사물과 그것을 찍은 사진 이미지 그리고 의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개념미술의 포문을 열었다. 나는 코수스의 ‘의자’와 상응하는 것을 유화 작품으로 보고, 작품의 원본성(originality)이 공격받는 그 제작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전시장 벽에는 (아마도 최후까지) 원본의 아우라를 갖는 유화 작품과 애초에 그 원본을 제작 하기 위해 존재했지만, 이제는 원본의 ‘복제’처럼 느껴지는 디지털 프린팅 된 사진이 나란히 걸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원본의 이미지를 포함하는 웹사이트 주소 및 QR코드도 함께 표기된다는 점이다. 정체불명의 문자와 기호로 시각화된 텍스트는 관객이 복제된 원본의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게 도와준다. 원본과 복제의 모호해진 경계에 일조하는 웹사이트 주소나 QR코드가 갖는 이러한 기능은 동시대 미술이 담보한 텍스트의 개념적 확장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오랜 기간 익숙해져 버린 작업 방식에서 자칫 놓칠 수 있었던 것들을 발견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이번 전시는 ‘Made in Korea’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보이지 않게 누적된 의문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고, 그것을 관객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또 다른 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Made in Korea
‘Made in Korea’ 시리즈는 ‘한국은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19세기까지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한자 문화권, 유교 사상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10년부터는 36년간 일제강점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남북분단 이후, 북한은 다시 중국의 영향권으로, 남한은 미국의 영향권 아래, 21세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진정한 한국의 것은 무엇일까?’
‘전통적’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의문과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어원들은 위의 질문에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한국의 역사적 그리고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의 것은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조합이 아닐까?’라는 주장을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작품에서는 한국의 이미지 대신, 오직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이미지와 아이콘의 조합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시리즈 타이틀을 ‘Made in Korea’로 함으로서 역설적으로 한국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 시리즈를 구상했을 2011년 당시, 우리 가족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한국인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 누구도 한국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중국 상하이에, 동생은 일본에(현재는 미국에), 그리고 저는 영국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역설적 표현 방식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번 시리즈의 첫 작품인 ‘Rei in Shanghai with Fifty Stars’에서는 일본의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인 애니메이션 캐릭터(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중국 경제의 중심 도시 상하이의 와이탄 풍경과 미국의 50개 주를 상징하는 별 50개가 어지럽게 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새로운 한국의 이미지가 아닌가 하는 것이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와이탄 풍경은 세계 여러 나라의 건축 양식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독특한 그들만의 풍경이 되었고, 이제는 중국 그리고 상하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Made in Korea’ 시리즈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에 영향을 준 미국도 수많은 이민자로 이루어져,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재의 미국이 되었습니다. United States of America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그것이 미국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기존에 있던 것들의 영향을 받은 조합, 합성 또는 차용이 새로운 “새로운 것”의 정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통한 작품 속에서 새로운 나의 것, 한국의 것을 찾는 것이 예술가로서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